Doubie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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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숲과 호랑이가 그려진 커튼 같은 구조물이다. 화면에 하나의 시점을 고정시키고 원근법에 기초해 그림을 그려왔던 전통은 그림을 정면에서 바라보도록 강요해왔다. 그러나 인간의 신체가 한쪽 눈에만 한정될 수는 없기에 이것은 명백한 시각의 억압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억압구조에 대한 의문에서 김동유의 작업은 출발한다. 요철 있는 캔버스는 좌우 양방향에서 서로 다른 두 개의 이미지를 제공하며, 신체의 움직임에 따라 그 두 개의 이미지는 점차 변화해간다. 관람자의 위치에 따라 다른 이미지가 등장하는 이 작업은 정면에서 바라보는 평면이어야만 했던 회화의 조건을 재고해 보도록 유도한다. 관람객이 다가서면 벽면처럼 버티고 있는 화면 속의 대나무 숲과 호랑이가 교차해서 보인다. 그림은 보는 방향에 따라서 달라 보이는 것이다. 한쪽에서 보면 순간 대나무 숲이 보이고, 다른 쪽에서 보면 대나무 숲과 함께 호랑이가 보인다.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호랑이가 드러나 보이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더불어서 그림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나타나거나 숨겨지는 이미지, 나아가 움직임을 암시하기까지 한다. 다분히 옵아트적으로 보이지만 옵아트란 것이 '패턴화된 문양의 동어반복적인 나열에 바탕을 둔 추상미술과 형식주의의 소산이라면, 작가의 그림은 분명 재현회화의 양식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그것은 일종의 위장인 셈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그림이란 그것을 대면하는 개별주체의 입장(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의미로 확대된다. 그것은 창작주체, 작가의 관점보다는 관자, 수용자의 입장을 중시하는 태도이자 기존의 그림의 소통과 관련된 틀을 흔들어 놓는다. 고정불변한 주체는 없다고 말한다. 이렇듯 김동유의 그림은 보는 이, 한 주체의 눈에 절대적인 지위와 권력을 부여했던 그간의 시방식(視方式)을 흔든다. 그림을 그린 주체의 지위도 애매해진다. 그는 단일한 이미지를 총체적이고 투명하게 재현하지 못한다. 그림 역시 한눈에 걸려들지 못하고 이미지는 이것이었다가 저것이기를 반복한다. 어느 한 이미지로 고정시킬 수 없다.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하다. 대나무 숲이면서 동시에 호랑이 그림이다.

박영택(미술평론가, 경기대 교수)